‘고래만 한’ 유조선도 ‘새우만 한’ 파도에 등 터진다

2007-08-31l 조회수 7319

파나마 선적 44만 t급 원목운반선 뉴카리사호는 1999년 2월 3일 미국 오리건 주 쿠즈 만(灣) 입구에 도착했다. 예정된 선적일까지 며칠을 항구에서 3.2km가량 떨어진 바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배는 높은 파도와 세찬 바람을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닷새가 지나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선체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틈으로 기름이 새어 나왔다. 당시 배는 40만 갤런(1갤런은 3.97L)의 벙커C유와 디젤을 싣고 있었다. 이틀이 지난 10일 선체에 물이 차면서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사고는 지금도 대형 특수선박의 대표적 해난사고 중 하나로 꼽힌다. ○ LNG운반선은 내부 액체의 충격도 ‘위협적’ 전문가들은 당시 사고 원인 가운데 하나로 ‘유탄성(流彈性)’ 문제를 꼽았다. 유탄성이란 딱딱한 고체 구조물이 유체(액체나 기체)의 반복적인 힘에 노출되면 재질이 연해지는 성질을 말한다. 딱딱한 선체가 파도에 계속 얻어맞게 되면 선체에 서서히 균열이 생긴다. 뉴카리사호는 5, 6일을 풍속 25∼45노트의 바람과 4.5∼7.8m 높이의 파도에 노출돼 있었다. 높은 파도에 배가 출렁이면서 선체 측면이 반복적인 힘을 받은 것이다.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을 견디며 항해하는 초대형 선박에 이 문제는 매우 위협적인 요소로 떠올랐다. 1999년 프랑스 인근 해역에서 좌초된 3만 t급 유조선 에리카호와 2002년 스페인 해상에서 반 토막 난 7만6000t급 유조선 프리스티지호 사고가 대표적인 사례다. 유탄성 문제는 배 안에서도 일어난다.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은 천연가스를 압축해 액체 형태로 저장해 운반한다. 배가 파도에 좌우로 흔들리면 배 안에서 LNG가 출렁이며 탱크에 반복적인 힘을 주게 된다. ‘슬로싱’이라고 하는 현상이다. 이 힘을 반복해서 받을 경우 탱크에 균열이 일어나게 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LNG선은 탱크를 80∼90% 이상 채우도록 규제하고 있다. 혈액과 근육이 접촉하는 심장이나 비행기 날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 유조선 등 선박 대형화 최대 걸림돌 조선회사들은 그동안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9년 알래스카 인근 해상에서 ‘엑손 발데즈호’가 좌초되자 사정이 바뀌었다. 당시 발데즈호에서 유출된 1100만 갤런의 원유는 이 일대에 사상 최악의 환경 문제를 일으켰다. 조선업계도 ‘한 번의 사고’가 야기한 엄청난 사태에 입을 계속 닫고 있을 수는 없었다. 비난의 화살을 직접 받은 유럽의 조선업계는 선박 설계 철학을 ‘친환경’과 ‘안전’ 쪽으로 돌렸다. 1만2600TEU(1TEU는 길이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급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과 26만6000m³를 적재하는 세계 최대 용량의 LNG선, 초대형유조선(VLCC) 등을 주력 수출품목으로 하는 한국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서울대가 올해 초 대우조선해양, 현대중공업, 한진중공업 등 국내 7대 조선소의 선박설계 전문가 23명을 인터뷰한 결과 응답자 대부분이 “슬로싱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대답했다. ○ 세계 최대 선급회사 200만 달러 연구비 지원 세계 4대 선급회사(선박기술 인증회사) 중 하나인 영국의 로이드레지스터는 최근 이 문제를 한국 과학자에게 맡겼다. 로이드레지스터는 내년 1월 서울대에 유체역학 및 유탄성학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5년간 연구비 2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서울대 공대 사상 처음으로 해외기관이 전액 지원해 설립하는 연구소다. 로이드레지스터 측이 내건 조건은 없다. 일종의 ‘묻지 마 투자’인 셈이다. 이 센터에는 이 학교 조선해양공학과 김용환 양영순 조선호 이신형 교수를 포함해 기계공학과와 재료공학과 BK21 해양인력양성사업단교수가 참여한다. 한국해양연구원과 한국기계연구원, 러시아 쪽 연구기관도 지원과 협력을 약속했다. 센터장을 맡을 김 교수는 “조선업계와 학계에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가장 어려운 난제에 도전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로이드레지스터가 연구비를 전액 지원한 대학은 영국의 사우샘프턴대와 카디프대 임피리얼대, 싱가포르의 싱가포르국립대, 네덜란드의 델프트공대 등 5곳뿐이다.

출처 : 동아일보 2007.8.31